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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의 존재 의미 1) 한국어사전

zepelin 2013. 3. 13. 15:18

친구와 사전에서 정말 중요한건 용례라는 얘기를 하던 참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건 외국어 공부하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거지 한국인에게 한국어사전이 그런 의미를 가지는건 아니잖아? 아 이런 인식도 가능하겠구나 싶어 한국인에게 한국어사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을 해본다.


1 사전은 언어의 집적체


한국어사전은 한국인이 한국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고민의 집적체다. 무엇이든 최소 단위로 나눠볼 수 있어야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사전은 단어와 숙어 등의 의미를 나누고 풀어 기술해놓은 책이다. 풀어 기술한다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설명한다는 것이지만 원래 세상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먹다를 '(사람이나 짐승이 음식물을)입으로 씹거나 하여 뱃속으로 들여보내다. / (사람이나 짐승이 끼니를)식사로 때우다. / (사람이나 짐승이 마실 것 따위를)입을 통하여 뱃속으로 흘려 넘기다. / (사람이나 짐승이 약이나 영양분 따위를)몸에 받아들이다. / (사람이 어떤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마음속으로 가지다. / (사람이 나이를)지금에 더하여 보태다.' 등으로 풀어쓰다보면 이게 맞는건가 싶어진다. 단어 그 자체보다 풀이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영어로 eat, have 등의 대역어를 적어주는 정도면 훨씬 쉽다.) 이런 과정을 시도하는 것이 자국어 사전이다. 우리에겐 한국어 사전이 그러하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해 뜻풀이를 상세하게 기술할 때 우리가 쓰는 말의 의미를 최소단위로 나누어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어사전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관찰해야 한다. 한국어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역시 나누어서 살펴야 한다. 한국어는 성격으로 구분할 수도 있고 글의 길이로 구분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 길이로 구분한다면 책/글/문단/문장/구/어휘/형태소/자모까지 갈 것이다. 사전은 표제어로 어휘/구까지를 다루는 책이고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문장이 가장 적절한 단위이다. 따라서 사전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문장 내에서 표제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반대로 해당 표제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표제어가 사용된 문장을 제시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것이 예문이다.


사전을 만드는 행위는 말을 겹치지 않고 누락이 없는 총체로 정리해내는 과정이다. 중복과 누락이 없이 정리하기 위해서는 개별 단위의 형식을 만들어내고 그 단위들이 모여있는 지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전에는 표제어, 발음, 품사정보, 문법정보, 어원 등의 요소들로 이루어진 표제항이라는 단위를 가진다. 그리고 어휘들을 수집하여 어떤 어휘를 등재할지 결정한다. 그렇게 결정된 어휘가 표제어이다. 해당 어휘들에는 여러가지 관계가 있다. 어머니가 있으면 아버지가 있고, 할머니가 있고, 엄마가 있다. 그런 어휘들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도 사전 내의 어휘 누락을 방지하고 어휘들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하는데 효과적이다.


사전을 만드는 것은 표준을 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해방이후 국가가 주도해서 편찬한 첫번째 사전인 표준국어대사전의 이름에 표준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전이 없다면 우리 생활은 꽤나 불편해질 것이다. 굳이라고 써야할지 구지라고 써야할지 정하기 어려울 것이며, 내가 쓰는 이 말이 남들도 쓰는 것인지 아닌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good이라는 단어를 굿으로 쓸지 굳으로 쓸지도 애매하고 혼란의 연속일 것이다. 그럴때 사전이라는 합의된 표준이 있다면 혼선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런 여러가지 과정을 거쳐 사전을 만드는 것은 언어라는 모호한 실체를 붙잡아 언어를 좀 더 쉽게 다루고, 그 언어를 쓰는 우리를 더 잘 알기 위한 과겅이다. 사전을 안만들고 안봐도 편안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야 말릴 수 없다. 하지만 나와 우리말을 더 잘 알고 싶다면 사전을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


2 변화하는 언어, 변화하는 사전


사전은 이미 다 만들어진거 아닌가. 신조어 정도만 잘 담아주면 사전을 대대적으로 고칠 것이 많은가. 등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해당 단어의 적절한 뜻만 요약해서 알고 있으면 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실용적인 질문에 실용적인 답을 해보겠다.


신조어는 분명 형태적으로도 기존 사전에 없는 것들이 많다. 멘붕이나 안습같은 말들은 그러하다. 하지만 기존 표제어형과 동일한 형태로 쓰이거나, 기존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는 경우 또한 다양하다. 털다의 경우 원래 뒤지다/빼앗다 등의 의미로 쓰였는데 2012년 즈음 이 의미로 상당히 유행했다. 즉 원래 있던 말의 특정 의미가 사용량이 급증하는 경우가 있다. 안드로메다의 경우 전문용어 고유명사지만 지금은 본질과 거리있는 상황, 발언들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런 의미 변화를 제대로 붙잡기 위해서는 용례를 끊임없이 살피거나 해당 표현의 사용빈도를 지속적으로 추적하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전산언어학의 발달로 이전에 비해 훨씬 용이한 작업이 되었다.


의미가 변하지 않은 단어도 설명에 사용된 예문이 옛날 예문이면 사용자가 의미를 바로 파악하기 어렵다. 50년대에 사용된 예문보다 2010년대에 사용된 예문이 지금을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더 직관적임은 명백하다. 물론 옛 문서에서 쓰인 용례 역시 중요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지 현재의 활용도를 고민한다면 끊임없지 현재의 에문을 더해나가야 한다. 또 이런 예문의 역사성은 해당 어휘가 어떤 의미를 획득해가며 변해갔는지를 보여준다. 1차자료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생생하다.


말은 의미를 포착하면서 미끄러진다. 미끄러지지 않는다면 오해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전은 그 말을 포착하면서 또 계속 미끄러진다. 그러니까 사전은 두번이나 미끄러지면서 의미를 담아내려 노력하는 책인 것이다. 언어가 유기체이고 그 유기체의 변화를 포착하려 한다면 사전 역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