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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8 어느 택시기사 이야기 2
not music2009. 8. 28. 03:06
좋은 사람들과 늦게까지 술을 먹고 들어온 길이지만 뭐랄까 적어두고 싶은 것이 있어 두시가 넘은 이 시간에 컴퓨터를 켰다.

매봉역 근처에서 2차를 끝내고 서로 헤어졌다. 본부장님이 택시라도 타라고 택시비를 주셨지만 소심하게 괜찮습니다 하며 택시를 잡아탔는데 나는 고민이 되었다. 택시비 꽤 나오는데 심야 좌석버스라도 탈까 하고. 한 20초 정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으니 기사님은 갈 곳을 잃으셨군요~ 하시면서 슬슬 나가신다. 묘한 여유가 느껴져서 말했다. 낙원상가 지나서 효자동으로 가주세요.

별 말없이 강남역 사거리에 왔다.
: 혹시 저 건물에 있는 '아이러브돼지엄마'라는 상호가 뭔지 아세요?
:: 아뇨 저는 처음 보는데요?
: 여기 지나갈 때마다 손님들에게 물어보는데 아무도 모르네요. 돼지엄마라면 우리 나이 때에는 뚱뚱한 아줌마나 부르는 말인데. 처녀 총각들 엮어주는 곳인가 아니면 암달러 바꿔주는 곳인가? 요새 강남역에 암달러 바꾸는 곳이 있을리도 없구요.
:: 연구 많이 하셨네요.
:: (알고보니 다이어트 클리닉이었다.)

다시 신논현역 사거리까지 왔다.
: 저 벌집같은 건물은 겉에만 저렇고 안쪽은 일반 건물이랑 똑같네요.
:: 아 저 건물은 기둥이 없답니다. 특수하게 지은 건물이래요. 저렇게 지은 건물은 하나 뿐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 제가 택시기사 노릇을 한 7-8년 했는데 생각보다 서울에도 볼만한 곳이 많아요. 다들 삭막한 곳이라고 합니다만, 역시 사람사는 곳이에요.
:: 아무래도 여기저기 다니시니 그러시겠어요.
: 예를들어 새벽에 마포대교에서 여의도쪽으로 오다보면 관악산이 의외로 잘 보입니다. 양 옆으로 선명한 능선까지 잘 보이는데 아주 멋있어요.
: 비가 많이 올 때 잠수교를 건너가면 바로 옆에 수평선이 있어서 기분이 좋구요.
: 밤에 손님이 없어 가끔 남산을 둘러가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외국영화처럼 몸파는 아가씨들이 줄을 서있기도 해요.
:: 하하 뭐 말 나온 김에 터널 말고 그리로 지나가주시죠.
: 그럴까요.

이렇게 해서 한남대교를 건너 굳이 좋은 터널을 놓아두고 남산을 돌아갔다.
: 저기도, 여기도, 많지는 않지만 아가씨들이 많이 있네요. 오늘은 평일이니까 없고, 금요일이나 주말에는 훨씬 더 많아요.
:: 호오, 한국에도 이런 풍경이 있다니 낯서네요.
: 이태원에는 빨주노초파남보 외국아가씨들이 많고, 여기나 하야트 호텔 근처에는 한국 아가씨들이 많이 서있어요. 예전에는 아줌마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었지만, 점점 나이가 어려지네요. 종종 하리수같은 애들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 하하, 뭐 저는 걱정 마세요.
: 실제로 홍석천씨를 태워본 적도 있지만 생각보다 수술한 사람들이 많아요.
: 택시기사를 처음 시작한지 1주일정도 되었나, 이태원에서 어떤 늘씬한 아가씨를 태웠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저음으로 '신사동 가주세요.' 이러니까 갑자기 머리 뒤가 쭈뼛하고 서더라고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여자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기대하고 있었건만 남자 목소리가 나오니까 당황한거죠.
:: 아무래도 그렇지요.
: 어떤 아가씨랑은 얘기하다가 미혼이라길래 왜 결혼 안했냐고, 내가 결혼만 안했어도 벌써 채갔을 거라고 하니 자기는 하리수같은 수술을 했다고 했어요. 이상한 것은 그 말을 들었을 때 뭐라고 불러야 하나 하는 호칭이 가장 먼저 난감하더라는 거에요. 죽어도 아가씨라는 말은 못하겠고. 어떻게 하나 하다가 손님이라는 말이 생각나데요. 그래서 그렇게 부르면서 얘기를 계속 했어요.
: 그 손님은 어쩌다보니 자기가 수술한 과정도 얘기해주게 되었어요. 거기를 자르고 나서도 거 뭐냐 껍데기까지는 자르지 않는대요. 그리고 그걸 안쪽으로 잘 넣는대요. 여자 거기를 만들어도 신경이 있어야 하니까요.
: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다보니 그 손님은 자기가 장거리를 많이 뛰니까 가끔 택시를 부르겠다며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어요. 저는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일부러 하나를 틀리게 적었어요. 그런데 그 손님은 자리에서 바로 전화를 한번 걸어보는거에요.
:: 하하하, 식겁하셨겠는데요.
: 예, 그래서 뭐 아이구 실수했네 하면서 번호를 잘 적어주었고, 그 손님은 가끔 멀리서도 저를 불러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안갔어요. 그렇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머리로 이해는 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 그 아가씨는 조금 섭섭했겠네요.
: 그런데 어느날 이태원 근처에서 그 손님을 또 태운거에요. 손님 말씀대로 그 손님은 섭섭했다고 하더라고요.
: 그래서 잠시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택시기사와 손님으로 만나서 좋았다. 그리고 당신은 나를 좋은 기사로 나는 당신을 좋은 손님으로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자주 만나다보면 서로 친한 관계가 될텐데 나는 당신과 좋은 관계가 될 수가 없다. 내 친구들에게 당신 얘기를 하면 그 친구들은 이상한 호기심만 드러낼 것이다. 그렇잖아요. 그놈들은 아마 그 손님 얘기를 하면 듣자마자, 야 따먹었냐? 어떻게 생겼냐? 이런 얘기를 한다구요.
:: 그럴 수도 있겠네요.
: 그러니 어떻게 되든 내가 당신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면 나도 모르게 나는 당신을 이용하게 되거나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을거라고. 나는 그 벽을 넘을 자신이 없어서 당신에게 가지 않은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 손님은 아무 말 없이 택시에서 내렸어요.

이 얘기를 할 때 즈음에는 이미 집 앞에 도착해있었다. 하지만 기사님이 열심히 말하고 계셨고 나 또한 뒤가 궁금해서 계산한 뒤에도 마저 듣고 있었다. 들으면서 이 기사분은 어린왕자를 아마 열번은 읽은 사람 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소심한 늙은 왕자처럼 주변의 여우들과 관계를 맺는데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소심함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라,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도시속에 사는 현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근처의 다른 손님들이 이 택시를 탈 수 있나 하고 창문을 들여다 본다.
:: 아, 손님이 타려나 봅니다.
:: 기사님은 제가 본 가장 낭만적인 택시기사였어요. 조심히 운전하세요.
: 안녕히가세요~
Posted by zepe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