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music2010. 1. 1. 16:37
전쟁영화 '사하라'를 보면 전직 식자공이었던 사병이 하나 나온다. 대략 아래와 같은 대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네는 꽤 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군.
: 저는 식자공이었습니다. 한 500권 정도 책을 식자했지요.

사하라 전차대
감독 졸탄 코르다 (1943 / 미국)
출연 험프리 보가트, 로이드 브리지스, 브루스 베넷, J. 캐롤 네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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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옛날의 타이피스트나 식자공은 나름 교양인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책 한권을 모두 타이핑한다고 생각해보라. 우리 어렸을 때 영어선생님이 연습장에 문장 베끼게 하던, 소위 빽빽이 숙제같은 것을 업으로 삼고있는거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바보일 리가 없다.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빌 브라이슨 (까치,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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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다보면 셰익스피어의 최초 전집인 퍼스트 폴리오를 조판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몇몇 셰익스피어 오덕들이 모여서 그 전집을 거의 해부하다시피 뜯어 통계를 냈고, 어떤 식자공이 어떤 철자를 선호했는가 등의 정보를 이용해 결국 8명이 나누어 식자했음을 밝혔다.

이쯤되면 거의 고고학이나 다를바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 식자공들은 그 누구보다도 셰익스피어 작품을 잘 알고 있었을거다.
(B 식자공이 절반 이상의 일을 했고, E 식자공이 가장 개판이었다고 한다. ㅎ 그리고 당시의 식자공들은 원고를 자기들 마음대로 수정하기까지 했다니 역시 나름 교양인? -_-)

마찬가지로 지금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나 교열기자 등도, 그 구력이 짧지만 않다면 나름 못지 않은 교양인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내 주변의 몇몇 출판 편집자들만 봐도 그 사람들은 상당한 교양의 소유자다.

번역자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 학계는 번역물을 폄하하는 경향이 심하지만, 사실 고전을 제대로 번역해냈다면 그것에는 너절한 박사논문 백개 이상의 가치가 있다. 아마도 나 혼자 하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식자공의 시대에 살짝 걸쳐있긴 했어도 사실 그 옛날의 인쇄를 경험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그 시대가 그립다. 아이폰에 책 몇권을 넣어봤지만, 그걸로 책을 읽고 싶지는 않은 것처럼.


Posted by zepelin